조선시대 못생긴 왕녀와 결혼 뒤 푸대접하고 첩과 불륜한 사건과 그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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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lWB6806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1-02-04 09:16본문
중종은 숙원 이씨에게서 서녀 효정옹주를 얻었으나 생모인 숙원이 일찍 죽자
원래 자식들에게 정이 많은 편이었던 중종은 불쌍한 마음에 딸을 극진히 총애했다.
옹주는 이조참판 조침의 아들 조의정과 혼인했다
그런데 조의정은 아내인 효정옹주가 박색이라는 이유로 미워하고
첩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부마의 규율을 깨고 축첩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효정옹주의 몸종인 풍가이를 첩으로 삼아
몸종 풍가이를 옹주처럼 대접하고, 옹주를 몸종처럼 대접했다
이런 소식들이 자꾸 들려오자 중종은 조의정을 불러 여러번 꾸짖었으나
효정옹주는 남편을 변호해주고 보호하는가 하면
참다못한 중종이 조의정을 유배보내려 하자
부왕을 찾아가 남편의 선처를 부탁했다
이런 옹주의 모습에 중종은
'투기도 할 줄 모르면 여자가 아니니라'고
답답한 마음에 나무라기도 했다.
결국 중종은 부마 조의정은 벌하지 않고
문제의 몸종 풍가이만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데
조의정은 풍가이를 다른 몸종으로 바꿔치기 하고
풍가이는 자신의 고향집에 숨겨둔 채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났다.
이는 명백히 왕명에 항명한 것이지만,
효정옹주가 눈감아 주었으므로 조의정은 몰래 이렇게 할 수 있었다.
1544년 효정옹주는 난산으로 위독해졌고,
결국 출산 15일 후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옹주가 난산한 이후 15일동안 조의정이 왕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중종은 딸을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조의정이 문을 제때 열어주지 않아서 옹주가 사망하며 논란이 된다.
게다가 일전에 귀양을 보낸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더 난리가 났다.
왕명을 어기고 왕을 기만했으니 역적죄라 해도 할말이 없는것이었다.
조의정은 부마의 직위를 떼어버리고 유배를 보냈으며
첩 풍가이는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유배를 가는것으로 처분이 났다.
원래 중종은 둘 다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고
옹주가 남긴 외손을 생각하여 조의정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그러나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은 뒤
효정옹주의 이모였던 상궁 은대에게 납치당했다.
장 100대를 맞은 뒤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여
장독이 퍼져 죽게 만드려는 이모 은대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목숨이 질긴 풍가이가 죽지 않고 살아남자
복수심으로 눈이 뒤집힌 은대는 하인들을 시켜
장 맞았던 곳을 다시 또 때리게 했다.
결국 풍가이는 또 장형을 당했음에도 20일 뒤에야 숨을 거둔다
상궁 은대 역시 왕명을 거역하고 살인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참형에 처해져야 했지만
중종은 은대를 크게 벌하지 않고 유배 보내는 데 그침으로서
이 비극적이고 잔혹한 복수극은 겨우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