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시 승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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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lWB6806 댓글 0건 조회 27회 작성일 21-02-13 01:03본문
고양시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92년
107만이 넘는 현재의 인구를 생각하면 시 승격이 굉장히 늦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양시보다 인구가 적은 성남시, 부천시, 안양시, 광명시, 안산시, 의왕시보다 승격이 늦은 것이다
특히 1990년 당시 고양군의 인구는 이미 24만 명이 넘어선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 경기도 7위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안산시(25만)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었고, 고양군 아래로 의정부시, 구리시, 시흥시, 하남시, 군포시, 의왕시, 평택시, 송탄시, 미금시, 과천시, 동두천시, 오산시 등 총 12개의 시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시 승격이 늦어지게 된 것이었을까?
이는 고양군이 파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내의 신도읍, 원당읍, 벽제읍, 일산읍, 지도읍이 따로따로 성장했던 것이다
고양군 시기 도시계획도 원당지구, 일산지구, 벽제지구로 나뉘어 진행됐다
심지어 신도읍과 화전읍(당시 신도면)은 1963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포함되어 서울에 편입될 예정이었다
(위 지도 왼쪽 위 녹색)
이 시기에 전화국은 미리 서울권에 편입되어 현재까지도 삼송동, 지축동, 용두동, 화전동 일대는 지역번호 031이 아닌 02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 지역 가운데 1973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 지역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도지구 전체의 서울 편입은 광명시와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1979년 서울 편입이 무산된 신도지구를 신도시로 승격시키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오히려 1985년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떨어져나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양군의 인구는 급격히 불어나 1990년 20만을 넘게 되었고, 정부는 시 승격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양군을 시로 승격시켜야겠는데 그냥 각 읍을 시로 승격시킬까?"
1990년대 초 당시에는 도농복합시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라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된 사례가 없었다
당시 지방자치법상으로는 군 전체를 시로 승격시킬 법적 근거가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까지는 군내에서 도시화가 진행되고 인구가 많아진 읍을 군에서 분리시켜 별개의 시로 승격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구 시흥군이다
시흥군 → 안양시, 과천시, 광명시, 안산시 일부(안산시에는 구 화성군 반월면 지역도 있음), 의왕시
따라서 당시 내무부는 기존의 관례에 따라 고양군을 다음과 같이 승격시키려고 했다
원당읍 + 지도읍 → 원릉시
벽제읍 + 신도읍 + 화전읍 → 고양시
일산읍 + 송포면 → 일산시
하지만...
"아 근데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데... 그냥 통째로 승격 안 되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90년 당시 인구 기준으로
(가칭) 원릉시 - 10.4만
(가칭) 고양시 - 9.1만
(가칭) 일산시 - 4.9만
(가칭) 일산시 지역까지 5만 명에 근접하여 모두 시로 승격할 수 있는 인구였던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 한 개의 군을 동시에 3개의 시로 만드는 것은 전례도 없었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법의 애매한 구석을 파고들자!"
당시의 지방자치법 제7조 (시·읍의 설치기준등)
① 시는 그 대부분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 5만이상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결국 이 규정을 '군 전역이 도시화되었다면 통째로 시로 승격시킬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고양군은 1992년 2월 1일 군 전역이 통쨰로 고양시로 승격하게 된다
이렇듯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된 곳이다 보니 고양시는 경기도 내 비도농복합시에 비해 면적이 상당히 크다
(268.1㎢)
고양시보다 작은 경기도의 시만 봐도 의정부시, 성남시, 부천시, 안양시, 광명시, 과천시, 구리시, 안산시, 군포시, 의왕시, 시흥시, 하남시 등이 있다
(이 도시들은 기존 군에서 1~2개 읍면이 시로 승격된 곳이다 보니 면적이 작다)
심지어 고양시 덕양구(165.44㎢)는 수원시(121.09㎢)나 성남시(141.82㎢), 안산시(149.1㎢)보다도 더 넓으며, 시흥시(166.60㎢)와 맞먹는다
이런 방식의 시 승격은 1995년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는 이것이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